-- 김형욱, 그는 어떤 인물인가?
김형욱은 1925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실종사건으로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그의 정확한 사망일자는 알 수 없다. 그는 1979년 10월 7일 파리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를 나선 뒤 실종됐는데, 이 날을 그의 사망일자로 잡기도 한다. 그의 유족들은 상속절차 등의 문제로 1990년 5월 법원에 실종선고를 청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서울가정법원은 이듬해 그에 대해 ‘1984년 10월 8일 사망’으로 간주한다는 실종선고 판결을 내린 바 있다. (* ‘실종선고’란 어떤 사람이 계속적인 생사불명상태로, 사망한 것이 거의 확실할 경우 법원이 사망한 것으로 간주, 그의 신분이나 재산관계 등을 확정하는 절차임)
1948년 김종필과 동기인 육사 8기생으로 군문에 들어선 그는 1961년 5.16 당시 육군 중령 신분으로 쿠데타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 최고위원으로 군사정권에 참여하였으며, 김재춘에 이어 제4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다.
'코리아게이트' 관련, 미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는 김형욱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김종필이 5.16 직후 만든 정보기관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위세를 가진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초대 김종필(1년 8개월), 2대 김용순(2개월)에 이어 3대 김재춘 부장도 불과 5개월밖에 지키지 못한 그 자리를 김형욱은 무려 5년 3개월(63.7~69.10)을 지켰다. 3공 초기 그는 박정희의 신임이 아주 두터웠는데, 그 시절 그는 박정희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가리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그가 ‘곰’ ‘멧돼지’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박정희의 신임도를 가늠할만한 사례가 하나 더 있다. 금년 2월호 <월간조선>에 흥미있는 통계가 하나 실렸다. 박 대통령 16년 통치기간 중 청와대에서 접견한 횟수(총 3만9318회)가 실려 있다. 1위는 최장수 국무총리(64.5~70.12)를 지낸 정일권 전 총리로, 총 990회를 접견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럼 2위는? 김종필 전 총리? 아니다. 바로 김형욱이다.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 재임 기간 중 무려 900회 박 대통령을 접견한 것으로 돼 있다.
3공 정권의 제2인자였던 3위는 김종필 전 총리는 729회에 그쳤다. 3공 말기의 또다른 실세였던 차지철 전 경호실장은 609회,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은 592회, 그리고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은 556회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같은 중앙정보부장 가운데서도 김형욱의 면담횟수가 가장 많다. (* 참고로 분야별로 보면, 행정부 관료(1만1412회)가 가장 많았고, 다음이 정치인(6420회), 청와대 비서(2226회), 군인(2045회), 중앙정보부장(2028회) 순이다)
실지로 그는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 1969년 3선 개헌 때 박정희의 재집권을 위해 ‘곰’처럼 뛰었다. 이 일로 그는 해임건의 대상에 오르기도 하였고, 박정희는 마침내 그해 10월 그를 중정 부장직에서 해임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권력에서 밀려나지는 않았다. 그는 1971년 7월 제8대 국회의원(공화당 전국구)이 되어 활동하다가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자 마침내 야인 신세가 되었다. 그가 ‘민주투사’(?)가 된 것은 이후부터다.
한편, 권력에서 밀려난 그는 중정 부장 재임시절의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것을 염려한 끝에 한국 탈출을 결심하였다. 마침내 73년 4월 15일 그는 대만대학에 박사학위를 받으러간다며 중정 부장시절 비서실장이었던 문학림을 데리고 대만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미국 현지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난하는 각종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그는 정치망명을 선언한 재미언론인 문명자씨에게 전화를 걸어 “문 여사, 용감한 결심을 존경합니다. 우리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 정권의 주구격이었던 그가 졸지에 ‘반한(反韓)인사’가 된 것이다.
<김형욱 회고록> 표지 사진
1977년 박 정권의 미국의회부정로비사건,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사건’이 터지자 그는 미국 연방 하원에서 구성한 프레이저청문회에 증인으로 채택됐다. 그는 청문회에 출석해 박 정권의 각종 비리와 흑막을 폭로해 박 정권을 궁지로 몰고 갔다. 그는 또 이같은 내용을 회고록으로 집필, 박 정권과 ‘거래’를 하기도 했다. <김형욱회고록>은 당시 뉴욕에 체류하고 있던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이 2년여에 걸쳐 그의 구술을 토대로 집필하였는데, 집필 당시 김 전 의원의 필명은 ‘박사월’이었다. (* 한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김형욱회고록>은 300만부 가량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문명자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 정권은 김형욱에게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는 대가로 50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하고, 이미 100만~150만 달러를 먼저 지불했다고 한다. 김형욱은 그 나머지 돈을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실종됐다는 것이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실지로 박 정권은 그가 회고록을 출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77~79년 윤일균 당시 중정 차장(해외담당), 이용운 전 해군제독 등을 밀사로 미국에 보내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는 대가로 150만 달러를 제공하고 여권 보장 등 구체적인 조건을 놓고 막후협상을 벌였다고 한다.
그가 실종된 이듬해 12월 일본에서 그의 회고록이 출간되자 1982년 3월 검찰은 이 책의 내용이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고무·동조했다며 그를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혐의로 기소했다. 그 결과 그에게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이 선고되었다. 후속조치로 서울 성북구 삼선동2가 203번지 소재 대지 4백14평과 중구 신당동 432의 1584번지 소재 대지 5백36평 등 그의 국내 전 재산이 국가에 몰수되었다. 그러자 그의 부인 신 모씨는 재산몰수의 근거가 된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대한 위헌심판 제청을 신청했으나 기각당한 바 있다. (* 이후 신 씨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는데, 1996년 1월 헌법재판소는 이 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여기서 잠시 눈여겨볼 것은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라는 법이다. 이 법은 그가 미국 의회에서 박 정권을 비난하는 증언으로 파문을 일으키자 1977년말 박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이 법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김형욱 한 사람 뿐이다. 이법은 피의자에 대해 ▲궐석재판이 가능하고 ▲궐석재판의 경우 변호인도 출석할 수 없으며 ▲증거조사 없이도 선고가 가능하게 돼 있는 등 오직 김형욱을 처벌하기 위한 위헌적 법률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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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
박정희 정권 하에서 반공정책의 최고책임기관이랄 수 있는 중앙정보부의 수장을 지낸 그는 회고록을 통해 북한의 고 김일성 주석이 항일운동을 한 인물이라고 밝힌 바 있어 눈길을 끈다. 지금이야 김 전 주석의 항일투쟁 사실이 역사적 자료로 입증돼 있지만 당시만 해도 ‘가짜 김일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같은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로선 발설할 수 없었다고 그는 변명하고 있다. 비록 그가 권력의 끈이 떨어진 후에 박 정권을 흠집내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고 보여지긴 하나, 3공 당시 정보기관의 수장이었던 그의 증언인만큼 기록의 가치는 있다고 보여져 관련 내용을 소개한다.
“.... 나는 진실을 말한다면, 해방 전 25세 약관의 김일성이 항일 무장게릴라전을 지휘하였고, 한 때는 중국 공산당 만주지역의 동북항일군 소속으로 압록강 및 두만강 연안에서 항일운동에 헌신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규모가 적기는 하였지만 그가 함남의 길주, 명천 등지의 남삼군에 상당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보천보전투를 지휘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중략)...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중앙정보부장) 재직 중에 김일성의 경력을 인정해주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식의 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반공교육체제를 확립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김일성이가 완전 ‘가짜’가 아니고 사실은 ‘진짜’라고 교정하는데 있어서는 중앙정보부장인 나도 겁을 먹고 조심을 해야 할 만큼 한국의 반공문화는 무서운 존재였다. 한국에서 용공이란 딱지는 천형만큼 잔인한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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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김형욱 회고록은 갖고 있는데, 다 읽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장인 나도 겁을 먹고 조심을 해야 할 만큼 한국의 반공문화는 무서운 존재였다. 한국에서 용공이란 딱지는 천형만큼 잔인한 저주였다"라는 그의 말, 참 실감나네요.
그리고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도 저로선 처음 알았습니다. 5.16 직후 민간인학살 유족들을 처벌한 법률이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었고, 그 6조가 '특수 반국가행위'였었는데, 그걸로도 부족했나 보군요.
잘 읽었습니다.
정보기관의 수장이 버젓이 진실을 알았으면서도
감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게 그 시절의 상황이었지요.
그런 점을 기억해두자는 취지입니다.
제 글을 관심있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두어 차례 더 쓸 작정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거액의 회유에 처단을 위한 특별법까지.
김형욱이 박 정권에서 비리를 모두 알고 있었나보군요.
5.16 초기부터 같이 활동햇던데다 중앙정보부장까지 지냈으니
박 정권의 전반을 두루 알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 예약포스팅의 힘이지요.ㅎ
그런 점을 기억해두자는 취지입니다.
제 글을 관심있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회고록을 통해 북한의 고 김일성 주석이 항일운동을 한 인물이라고 밝힌 바 있어 눈길을 끈다. 지금이야 김
실지로 그는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 1969년 3선 개헌 때 박정희의 재집권을 위해 ‘곰’처럼 뛰었다. 이 일로 그는 해임건의 대상에 오르기도 하였고, 박정희는 마침내 그해 10월 그를 중정 부장직에서 해임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권력에서 밀려나지는 않았다. 그는 1971년 7월 제8대 국회의원(공화당 전국구)이 되어 활동하다가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자 마침내 야인 신세가 되었다. 그가 ‘민주투사’(?)가 된 것은 이후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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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상속절차 등의 문제로 1990년 5월 법원에 실종선고를 청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서울가정법